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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유공자가 되고(조완규 이사장)

사단법인과학키움 2024.05.24 14:38 조회 31

과학기술 유공자가 되고

조 완 규

 

지난해 1030일 국제백신연구소 나의 사무실 문에 대한민국과학기술유공자패를 부착하는 명패헌정행사가 있었다. 이 행사에는 다른 유공자와 과학기술한림원 임원 등이 참석하였다. 2021년 이상민 의원이 발의한 과학기술유공자 예우에 대한 규정에 따른 행사였다. 1945년 해방 이후 황무지와 같았던, 그리고 1950년 터진 6.25전쟁이 3년을 지속하는 가운데 경제기반이 거의 바닥 이었으나, 대한민국이 10대 경제대국에 이를 만큼 성장한 것은 결정적으로 과학기술력의 기여라 할 수 있다. 201512, 정부는 해방 후 과학기술에 크게 기여한 학자 82명을 유공자로 선정하였다. 그 중 62명은 이미 타계 하였고 나머지 생존자 20명이 과학기술유공자회를 구성하였고 내가 유공자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 뒤에도 해마다 유공자를 선정함으로서 유공자 중 생존 유공자 수는 모두 24명이다.

1948, 2년간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예과과정을 거친 나는 화학과를 희망 하였으나 예과생 200 가운데 90여 명이 문리과대학 화학과로 진입함으로써 나는 15명이 선택한 신설학과인 생물학과를 택하였다. 생물학과에 적을 두더라도 화학을 청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생물학과에는 일본 북해도 제국대학 출신인 세포학 전공인 동물학 교수와 역시 일본 북해도제국대학출신인 식물생리학을 전공한 식물학교수의 두 분 뿐이었다. 실습용 장비도 매우 빈약하여 학생용 현미경 3대와 정온기 뿐이었다. 당시 세포학은 첨단 분야이며 나는 이에 흥미가 있어서 이를 전공분야로 택하였다. 각종 생물의 세포를 염색한 후 이를 현미경을 통해 염색체의 구조를 비교 관찰하는 지도교수의 일을 도왔다. 3학년 때 6.25전쟁이 터졌고 동급 학생들 대부분이 군입대, 월북 혹은 행방불명 등으로 결국 1952년 나 혼자 생물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원 진학도 나 혼자였다. 생쥐 꼬리에서 채취한 혈액을 슬라이드에 얹어 커버글라스로 덮고 백혈구의 운동능과 수명을 관찰하여 그 결과를 정리하여 1956년에 이학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논문이다. 1957년 문리과대학 생물학과 전임강사로 발령받은 나는 학과의 연구용 기자재 불비 등 열약한 연구여건으로 인하여 연필과 종이로 할 수 있는 연구과제, 즉 한국인의 미각, 혀의 모양새, 색감이상자의 빈도 등 인류유전학 등을 택하여 여러 편의 논문을 썼다. 그 중 두, 세편은 국제학술지에 실렸다. 그런 가운데 나는 연필과 종이로 할 수 있는 연구과제, 즉 우리나라 출생성비와 관련된 분야를 연구주제로 택하였다. 1930년 영국의 학자는 우리나라 남아 출생률이 여성 출생 100명에 118명으로 세계에서 가당 높다고 하였고, 한편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과의 일본인 교수는 100100으로 남아 출생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고 발표하였다. 나는 어느 쪽이 옳은지를 밝히고 싶었다. 의과대학 산부인과 자료를 수집하였고 서울, 강원 혹은 제주도 등 한반도 전 지역 주부를 면담하며 자녀의 출생상황을 집계하였다. 그 결과 여아 출산 100에 남아 출생 110의 결과를 얻었다. 또한 우리나라 부인의 출산력과 관련된 연구도 계속하였다. 1960년도 중반에 대일청구권과 IBRD 등의 재원으로 연구용 시설이 갖추어짐에 따라 나는 기자재를 이용한 연구과제로 바꾸었다. 최초의 실험실 연구과제는 한쪽 난소를 제거한 생쥐의 나머지 난소에 미치는 생식선자극호르몬의 보상작용에 관한 연구였다.

1964년 나는 미국 록펠러재단 소속 미국인구협회(Population Council) 생의학부 연구장학생으로 선발되어 2년간 미국 필라델피아의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였다. 연구소장인 ‘J. Biggers’ 교수는 생쥐 연골을 인공 배양액에서 배양하며 골화현상을 연구하는 세계적인 학자였다. 나는 그가 개발한 배양액에 생후 2주인 생쥐 난소를 배양하며 배란을 유도하는 실험에 집중하였다. 배양 중인 난소는 3, 4일 후, 선명한 극체를 갖춘 난자를 배란하였다. 난소를 배양하는 실험은 이것이 최초이며 따라서 배양 중인 난소로부터 난자의 배란을 유도한 실험은 내가 처음이었다. 귀국할 때 록펠러재단으로부터 연구비 15,000달러를 수령하였다. 그 연구비로 미국, 유럽 등 30여 군데 업체에 1,000여 가지 연구용 기자재를 주문하여 완벽한 배양실험실을 갖추는데 1년이 걸렸다. 나는 인공배양액을 구득할 만큼 연구비가 넉넉지 않아 대신 생쥐의 안전방(眼前房) 내 체액을 난자 배양액으로 이용하기로 하였다. 안전방 내 체액의 조성은 인공배양액보다 생체의 배양실험에 더 유익함을 알고 실험실 기자재가 갖추어지기까지 생쥐 여포난자 배양에 안전방을 이용한 실험을 지속하였다. 안전방에 이식된 생쥐의 미성숙난자는 어김없이 정상적인 성숙과정을 진행하였고 이미 자궁에 착상할 단계의 포배까지 분화하였다. 인공배양액을 구입할 재원도 없고 또 직접 배양액을 제조할 원재료도 구하기 어려운 때 안전방 내 체액을 난자 배양실험에 이용한 것은 매우 창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1970년부터 2년간, 두 번째 외국 연구소 연구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WHO 지원을 받아 미국 볼티모아의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4개월, 보스턴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10개월 그리고 귀국 전 8개월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연구소에서 보냈다. 특히 dbcAMP와 생쥐 난자의 성숙억제 관련 실험에 집중 하였다. dbcAMP의 효능은 난자 핵막이 존재할 때 영향을 주고 핵막이 제거된 난자에게는 별 영향이 없음을 밝혔다. 일반적으로 난자 배양실험은 유리로 제조된 배양접시를 이용하였다. 직경 5cm, 높이 1cm의 유리배양접시 내에 파라핀 오일로 가득 채우고 그 바닥에 5mm 정도의 성분이 다른 서너개의 배양액을 심고 그 속에 난자를 넣어 배양실험에 이용한다. 배양접시 안에 심어 넣은 난자 등을 37도 온도를 맞추고 5%CO2 탄산가스가 공급되는 정온기 내에서 배양한다. 난자의 성숙과정을 점검하기 위하여 수시로 배양접시를 정온기에서 끄집어내어 현미경 재물대까지 옮겨 관찰하지만 그때마다 파라핀 오일이 밖으로 흐르거나 혹은 오일 밑의 성분이 다른 배양액이 뜻하지 않게 합쳐지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 배양접시를 옮기는데 많은 신경을 써야 했다.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한 방편으로 미세관 이용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5cm로 자른 구경 1mm의 유리관 중앙에 1cm의 배양액을 넣고 그 안에 실험용 난자 혹은 수정난을 심고 양 끝을 2mm의 파라핀 오일로 막은 후 이 미세관을 정온기에 옮겨 난자의 분화과정을 관찰하는 소위 미세관 배양법, ‘Microtube Culture Method’를 개발하였다. 나는 이 미세관 안 배양액에 수정난, 2-세포기의 분화 중인 미성숙 난자를 넣고 이 미세관을 시험관내에 고정시키고 시험관의 이동 중 유리관이 37도로 유지되도록 여러 겹의 솜으로 싸아 내 몸에 묶은 후 걷고, 버스 타고 기차를 타며 케임브리지에서 이틀 뒤 에딘버러의 친구 연구실을 찾았다. 그리고 그가 보는 앞에서 시험관 내의 미세관을 풀어 미성숙 배아의 분화 상황을 점검하였다. 이틀 사이 내 몸에 묶인 미세관 내 어떤 난자들은 이미 포배로 분화하였고 혹은 분화 중이었다. 이 결과를 확인한 교수들은 경탄하였다. 이 방법은 한 때 미국내 발생생물학 교과서에 ‘Cho’s Method’로 소개 되기도 하였다. 결국 미성숙 동물의 배아를 원거리로 이동하여 그곳의 암컷 자궁에 이식하여 착상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대학 교수로 재직 중 미국, 영국 대학에서 4년간 연구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큰 보람이었다.

1968년 학생들의 반정부 및 민주화 쟁취를 위한 소요가 극심할 때 나는 문리과대학 학생과장으로 임명되었다. 2년간 학생과장 근무로 피곤하여도 근무가 끝나는 대로 연구실로 복귀하여 제자 및 대학원 학생 연구지도와 연구활동에 전념하였다. 당시의 나의 제자가 소위 설랑동문회이름으로 한해 두세 번 모여 우의를 돈독히 하며 지난 1년간의 연구활동을 소개하는 등 40년간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1980 서울대학교 부총장으로 임명되면서 연구활동에 전념할 수 없었던 것은 몹시 아쉬웠으나 내 제자 그리고 연구실 대학원 학생이 나의 연구실을 지키며 내 분야인 발생생물학 연구에 큰 업적을 축적한 일은 나의 자랑이라 할 수 있다. 교수직 퇴임 때까지 나의 발표 논문 수는 110여 편이 된다.

1974년 문리과대학 이학부장일 때 대학본부의 승인을 받고 미국대사관 AID 담당관과 교육차관금 획득을 위한 협의를 하였고 결국 5년간, 5백만 달러 AID 차관금을 획득하는데 성공하였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동하면서 나는 새로 출범한 자연과학대학 학장으로 임명되었고, 이 차관 사업을 주관하게 되었다. ---(이후 내용 첨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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