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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받고(조완규 이사장)

사단법인과학키움 2024.05.24 14:42 조회 28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받고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조 완 규

 

지난 1013일 나는 서울대학교 개교기념식에서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받았다. 그 전에 자연 과학대학 유재준 학장으로부터 상 수상자로 추천하였다는 통보를 받고 곤혹스러웠다.

시상증서에는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생물학의 여명기에 교수로 부임하여 연구와 후학양성에 전념, 자연과학대학 초대학장, 부총장, 총장직 재직 중, 대학안전과 발전에 기여, 그리고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초대원장으로 한림원의 기틀 다지기, 그리고 국내 유일한 국제기구인 국제백신연구소 유치와 한국후원회 상임고문직으로 연구소 일을 지원하고 있으며 교육부장관 역임 등 서울대학교 동문으로서 대학의 명예 신장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간의 나의 행적을 높이 평가한 서울대학교가 나에게 주는 상이다.

나는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예과부에 입학, 4년간의 외국유학 기간을 제외하고는 오늘까지도 서울대학교 땅을 밟고 살아오고 있으니 나만큼 서울대학교의 혜택을 입고 살아온 동문은 없을 것이다. 201110월 나는 첫번째 자랑스러운 자연대인상을 받았다. 그때도 무척 민망하고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서울대학교에 더 많은 은혜 갚음을 해야 할 상황에서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받은 것이다.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예과부를 거쳐, 신설학과인 생물학과로 진학하였다. 새로운 생물학 분야인 세포학을 전공하였다. 특히 새로 도입된 생세포 염색법으로 염색한 생쥐세포를 현미경 밑에서 관찰할 때 나타나는 염색체가 매우 신기하였다. 1952년 졸업한 후 바로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하였다. 당시 새로 나온 항생물질, Streptomycin이 생쥐 백혈구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하여 생쥐 꼬리에서 적출한 혈액 중 백혈구를 슬라이드 유리에 실려 현미경으로 그의 운동능력과 수명을 관찰하였고 그 결과를 정리하여 1956년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하였다. 1957년 전임강사로, 그 후 조교수, 부교수, 교수로 재임하였다. 교수직 재직중에는 배양중인 생쥐 난소의 배란 유도 혹은 배란된 난자의 성숙 억제와 관련된 연구에 종사하였다. 19642년간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로 유학하여 배양중인 생쥐 난소의 베란 유도와 관련한 연구에 열중하였다. 귀국 후 록펠러재단으로부터 수령한 연구비 15 달러로 생쥐 난자 배양에 필요한 실험용 기자재 등을 갖춘 실험실을 꾸몄고 실험에 열중하였다. 나의 지도로 석, 박사학위를 취득한 제자들이 나의 호를 딴 설랑(雪浪)동문회를 조직한 것이 거의 40년이 된다. 그동안 이들은 매년 연초, 5월의 스승의 날그리고 8월 여름에 모여서 각 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인 동문 문하생들의 제자들이 모여서 1년간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등 학술교류 행사 등으로 이틀을 보낸다. 제자들이 꾸민 설랑동문회처럼 연례행사로 발전한 연구실 모임은 흔치 않다. 나의 사후에도 이 모임이 계속 지속되고 끝내 국제적 설랑 발생생물학회로 발전하기를 소망한다.

한참 연구실에서 연구에 전념하던 중, 1966, 정치학과 교수인 민병태 학장으로부터 학생과장 임명 통고를 받았다. 당시 문학부 학생이 주도하는 반정부, 민주화 쟁취 등 구호를 외치며 벌어지는 시위로 연일 학내가 소란하던 때다. 따라서 문학부 교수가 학생과장직을 맡아 온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이학부 교수인 나를 그 자리에 임명한 것이다. 학생과장 임명을 고사하며 학장실에서 2시간 버텼지만 이미 발령이 난 뒤여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인문, 사회학과대학 교수와 접촉할 기회도 없었고 또 그들을 알지도 못하며, 더더욱 당시 학장인 민병태 교수를 만난 일도 없었고 단지 실험실에서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는 나를 학생과장으로 임명하였다. 이학부 교수요 실험실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나를 누가 학생과장으로 추천하였는지 아직도 모른다. 앞의 학생과장은 누구라 할 것 없이 3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그 직에서 물러났다. 나도 그럴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임기 2년을 채웠다. 대학본부는 나를 풀어 주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운동권 학생들에게 외쳐대는 과격한 구호를 무디게 하도록, 2시간 끌 시위를 1시간에 끝내도록, 그리고 가능하면 강의실 혹은 도서관 시설을 점거한 철야 농성을 자제 하도록 당부하였다. 그들은 가끔 나의 그 같은 부탁을 들어 주었다. 그 대신 나는 철저히 학생을 보호하였다. 형사가 수색중인 학생을 숨기거나 혹은 집으로 데리고 가 하루 재워서 보내기도 하였다. 결국 살벌한 학내 분위기는 많이 풀렸다. 그러니 대학이 나를 풀어 줄 생각이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물론 학생들도 나의 학생과장 연임을 바라고 있었다. 국문학과 전광용 교수는 양쪽이 조 교수의 학생과장직 연임을 바라니 그는 성인인가, 군자인가, 놀랍다고 평한 일이 있다. 원래 나는 선거, 피선거권이 있는 대학생은 당연히 정부에 대하여 비판할 권리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당시의 학생운동 주동자들은 오늘날 각계 원로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 가운데 손학규, 유인태 등 원로 정치인이 있고, 김종섭, 이경형 등 현재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회장, 부회장이 있다.

1974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기 1년 전, 신임 이해영 학장이 밤늦게 전화로 나를 문리과대학 이학부장직을 맡기기로 하였고 외국 출장 중인 10일간 학장직무대리를 맡으라고 통고하고 전화를 끊었다. 당연히 선배교수가 맡아야 할 자리를 까마득한 후배가 맡게 된 것이다.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이 학장은 다음 날 아침 일찍 김포공항으로 떠났다. 물론 나의 이학부장 임명에 선배교수, 원로교수가 불만이었던 것은 당연하였다. 어쩔 수 없이 이학부장이 된 나는 본부의 양해를 얻어 1년 뒤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발족할 자연과학대학의 기초과학 교육 및 연구 수행에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하여 미국 대사관 AID 담당관 Nable 박사를 만나 AID 차관금 획득관련 협의 끝에 차관금 5백만 달러 획득에 성공하였다. 조건은 ‘10년 거치, 40년 상환, 이자 3%’였다. 일부 교수는 전액 연구용 기자재 구입에 투입하자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나는 차관기금 중 250만 달러를 80명의 자연과학대학 교수가 1년 혹은 1년 반 미국의 대학 또는 연구기관에서 체류하는대 소요되는 재원으로 배당하였고 나머지 250만 달러로는 미국에서 쓰던 연구용 기자재 구입에 필요한 자금으로 배정하였다. 그리 함으로서 교수들은 귀국 후에도 같은 주제의 연구를 계속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써 자연과학대학의 연구역량은 일시에 국제수준으로 신장하였다. 정부가 지원한 차관사업 중 자연과학대학의 차관사업이 가장 성공한 예로 기록되고 있다.

19752월 말, 부산 출장 중인 나는 뜻밖에 내가 새로 발족한 자연과학대학 학장으로 임명된 사실을 신문을 보고 알았다. 원로교수 혹은 선배교수가 자신들이 맡아야 할 자리를 까마득한 후배가 맡게 되었으니 교수 분위기가 어떠했을까는 불문가지다. 본인의 뜻을 묻지도 않고 마구 학장발령을 낸 총장에게 나는 임명 철회를 강하게 요구하였다. 총장은 당시 나를 찾았다고 하였다. 1975228일 오후 6, 정부가 최종적으로 문리과대학을 인문대,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의 3개 대학으로의 분리를 결정하였고 따라서 31일부터 새로운 체제의 대학으로 출범하여야 함으로 밤새 학장을 임명 하여야 하였다. 어찌되었던 학장으로 임명된 나는 대학 개혁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그동안 학과장인 원로교수가 신임교수를 추천하여 왔지만 나는 이 관례를 바꾸어 교수 공개모집 방법을 택하였다. 총장으로부터 얻은 30개의 교수정원을 채우기 위하여 전문학술지, 신문 등 매체에 교수직 모집광고를 냈다. 미국 등 명문대학교 학위 취득자 다수가 공모에 응하였고 그 중 인사위원회에서 천거한 후보자가 교수요원으로 임용되었다. 아울러 교수연구비 관리제도를 개선하였다. 그동안 교수 개개인이 관리하던 연구비 중앙관리제도에 불만인 교수도 있었지만 결국 나의 설득을 받아 드렸다---(이후 내용 첨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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